※ 광개토왕의 행적 중에 그의 즉위와 죽음 및 전투에 대한 기록만 다룬 연표임
※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이미 이전에 올렸으나 내용이 부실하므로 조금 더 수정해서 재업함.
* 즉위 (391/392)
고구려 광개토왕 18세의 나이로 즉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선 392년 / 광개토왕비문에선 391년)
* 백제 북부 공략전 (392)
392년 7월, 광개토왕이 직접 4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북쪽 변경을 공격해 석현성 등 10여개 성을 빼앗음. 백제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는 반격을 하지 않았음.
그해 9월, 광개토왕이 북쪽으로 군사를 보내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00 명을 포로로 잡고 빼앗긴 백성 1만 명을 되찾음.
그해 10월, 광개토왕이 사방이 바다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백제의 요충지 관미성을 7방면에서 포위하여 20일 간 공격한 끝에 빼앗음.
그해 11월, 패전의 여파로 백제에서 정변이 일어나 진사왕이 살해당하고 그 조카인 아신왕이 즉위함.
* 백제의 공격 방어 (393~395)
393년 8월, 아신왕이 외삼촌인 좌장 진무에게 1만 군사를 주어 관미성을 거세게 공격했으나 (사령관인 진무가 날아드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싸웠다고 할 정도로 백제군도 필사적이었음) 광개토왕이 장수들을 보내 백제의 보급로를 끊어 물러나게 만듦.
394년 7월, 아신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광개토왕이 직접 5천 기병을 거느리고 수곡성에서 이를 격퇴한 후 남쪽 변경에 7개 성을 쌓음.
395년 8월, 아신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광개토왕이 직접 7천 군사를 거느리고 패수에서 진을 쳐 좌장 진무를 격퇴하고 8천 명을 살상함.
그해 11월, 아신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까지 진격했으나 폭설이 내려 군사들이 얼어죽자 퇴각함.
* 패려 정벌전 (395)
395년,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패려(=거란 필혈부)를 원정하여 염수(=시라무렌강)에 이르러 3개 부락 및 6~700영을 격파하고 소,양,말 등의 무수히 많은 가축을 노획함.
광개토왕은 길을 돌려 양평도를 순행하며 동쪽 지역을 시찰하고 사냥을 함.
* 위례 공략전 (396)
396년, 광개토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함. 영팔성 등을 비롯해 백제의 여러 성을 함락시킴. 이에 백제가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자 광개토왕이 아리수(=한강)을 건너 백제의 국성(=위례성) 가까이에 이르자 백제군이 퇴각함.
결국 아신왕이 남녀생구(=노비) 2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며 앞으로 영원토록 고구려의 노객(=신하)이 되겠다고 맹세하자 광개토왕이 도성으로 돌아감. 이때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얻어낸 영토는 58성 700촌에 달했고, 백제왕의 아우 및 대신 10여 명을 인질로 잡았음.
* 식신 정벌전 (398)
398년,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 식신(=숙신)의 땅과 골짜기를 순찰하고 막□라성과 가태라곡의 남녀 300여 인을 잡아감.
이후로 식신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며 나랏일을 의논하게 됨.
* 한반도 남부 원정 (400)
399년,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광개토왕이 평양을 순행하던 중 신라의 사신이 왜인의 공격을 받고 있으니 도와줄 것을 요청함.
400년, 광개토왕이 5만 군사를 보내 포위당한 남거성과 신라성(=서라벌)을 구원하고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하도록 함. 고구려군은 왜군을 쫓아 임나가라 종발성에까지 이른 후 (가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왜군을 크게 격파함. (아마도 가야와 왜의 커넥션이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보이지만 광개토왕비문에서 이 부분이 크게 훼손되어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음)
이후로 신라 매금(내물마립간)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며 나랏일을 의논하게 됨.
* 요동 정벌전 (402)
400년 2월, 후연왕 모용성이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모용희에게 3만 군사를 주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과 남소성 및 700리 땅을 빼앗고 5천 호의 인구를 강제이주시킴.
402년 5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남.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으나 숙군성의 위치가 요하 서쪽 부근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에 이 시점에서 이미 요동 지역은 광개토왕이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해서 숙군성까지 공격한 것으로 보임.)
404년 11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 또다시 후연을 공격하여 연군을 공격하고 1백여 명을 잡거나 죽임.
(※ 광개토왕 당시 중국 출신으로 고구려에서 고위관료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진이라는 인물의 무덤인 덕흥리벽화고분이 발견된 바 있는데, 그 벽화의 묵서명에 따르면 진은 유주자사의 직책을 지냈다고 함. 뿐만 아니라 그가 요서 13군 태수의 보고를 받는 광경을 묘사한 벽화도 있음.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광개토왕 때에 고구려가 요서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으며 진은 고구려 치하의 요서를 관할하던 인물이라고 보기도 함. 혹은 이런 유주자사의 직위가 허직이었다거나 혹은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이치된 교군을 관할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어 확실한 것이 없음. 확실한 것은 광개토왕 당시의 고구려가 요서 일대를 장기적으로 통치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임.)
* 대방 방어전 (404)
404년, 왜군이 대방계에 침입하자 광개토왕이 직접 평양으로 가서 왕당(=국왕직속부대)을 거느리고 길목을 막은 후 좌우로 협공하여 왜군을 궤멸시킴. (왜가 단독으로 서해를 통해 대방 지역을 쳤다고 보기 힘들기에 그 배후에 백제가 있었다고 추측하는 견해가 있음.)
* 후연의 공격 방어 (405~406)
405년 1월, 후연왕 모용희가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시키기 직전까지 갔으나, 모용희가 자신과 황후가 수레를 타고 입성하기 전까지 군사들이 먼저 성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는 바람에 시간을 벌게 된 고구려군이 방비를 강화함. 결국 모용희는 요동성을 빼앗지 못하고 패퇴함.
406년 12월, 후연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형북에 이르렀다가 실패하자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했으나 병사들이 추위와 피로에 시달린 끝에 실패하고 돌아감.
* 수수께끼의 전투 (407)
407년, 광개토왕이 5만 군사를 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광개토왕비문의 글자가 훼손되어 판독불가)과 교전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고 1만여 벌의 갑주와 병장기를 노획했으며 사구성 등 여러 성을 빼앗음. (당시 고구려와 싸웠던 세력의 정체는 명확히 알 수 없음. 아마도 백제-왜의 연합군이나 후연 중 하나로 보임.)
* 동부여 원정 (410)
410년,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동부여를 공격함. 고구려군이 여성(=동부여의 도성)에 이르러 (아마도 동부여의 항복을 받아낸 후) 돌아감. 이 때에 동부여의 여러 압로(=동부여의 지배층)들이 광개토왕을 따라 갔으며 64성 1400촌의 영토를 얻었음.
* 죽음 (412/413)
고구려 광개토왕 39세의 나이로 사망함.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선 413년 / 광개토왕비문에선 412년)
414년 9월 29일,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유해를 산릉에 매장하고 그의 훈적과 수묘인 제도에 대한 교시를 기록한 비석인 광개토왕비문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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