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차기 총리의 뇌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AV 규제는 참 구미가 땡기는 사안입니다. 학부모 및 여성 유권자, 시민단체 그리고 성보수주의 꼰대들의 지지를 받는 건 물론이고 정권의 도덕적 청렴성을 강조할 수 있으니 이미지 정치에도 유리합니다. 올바른 국가를 위해, 여성 인권을 위해 내가 이렇게 노력했다 내세울 수도 있고요. 그깟 AV 있어봤자, 국가발전에 뭔 도움이 되겠냐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본인의 과거 경험에 비추어봐도 정치적인 효과는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AV를 금지한다고 하면 소비자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고, 이걸로 먹고 사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니 파급효과가 부담스럽습니다. 일본은 헌법에서 검열을 금지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다짜고짜 움직이면 정치적 리스크를 온전히 떠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일본이 유사 민주주의라 한들 여론의 분위기는 중요합니다. 스가나 아베나 의원내각제에서 본질적으로는 국민의 표로 뽑히는 국회의원들이니깐요.
그래서 위정자는 효율적인 정책 시행을 위해 언론을 이용합니다. 언론 통제라고 하면 국가가 직접 나서서 때려잡는 거만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현대 국가에서 대부분의 언론 통제는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집니다. 관습과 불문율을 교묘하게 활용해서 언론들이 스스로 알아서 정권의 입맛에 맞는 보도만 내보낼 수 있도록요. 이와 관련해서 '손타쿠'라는 단어를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의 배경으로 지적된 손타쿠 풍조

아베 정권에서 손타쿠 풍조를 확산시킨 주범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스가 요시히데입니다.
'손타쿠'(촌탁)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의중을 미루어 헤아리고 알아서 설설 기는 정치관행을 말합니다. 위에서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라고 하더라도 아래에서는 눈치껏 알아서 움직여야 합니다. 눈치 없이 자기 맘대로 구는 사람은 찍혀서 나중에 불이익을 받습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려면 상급자의 눈치를 보는 능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일본은 손타쿠가 너무 지나치다 싶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 공무원이 손타쿠 풍조에 빠지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가 않은 것 같네요.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은 이런 식으로 눈치껏 일하면서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물론 스가 본인도 그렇습니다.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공장일 하며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다 정계에 입문했지만, 빽도 없고 자기세력도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눈알 굴리며 인맥을 쌓아 총리까지 올라간 자수성가형 인물입니다. 그는 손타쿠의 귀재였기에 당내 입지를 마련할 수 있었고, 반대로 아랫사람들에게는 "임자 알아서 해'를 남발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언론통제에서도 손타쿠는 효과적입니다. 정부에선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습니다. 은연중의 내심만 비치고 눈치 없는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면 그 다음부턴 알아서 통제됩니다. 보도지침을 내리더라도 증거가 남지 않게 구두로 말합니다. 손타쿠 때문에 언론에서는 알아서 입을 막거나 왜곡하거나 과장하거나 축소해 줍니다. 일본 문화가 성적으로 개방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엄청 보수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이중성 역시 손타쿠가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예술성을 인정받은 춘화라고 하더라도 대형 미술관에서 함부로 전시회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손타쿠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대형 미술관을 운영하는 공공기관이나 사회적 기업들이 윗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스스로 알아서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공기의 검열'(空気の検閲)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직접 검열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흐름을 간접적으로 검열하는 것이에요.

정부가 좋아하는 말만 말하는 손타쿠 방송들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 <주전장>이 상영 보류된 것도 가와사키 시의 지나친 손타쿠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당시에 일본 기업들이 침묵한 것도 손타쿠라는 지적이 있었다.
다큐 <춘화와 일본인>에서는 손타쿠가 어떻게 일본의 성문화를 통제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약 진짜 차기 총리가 AV 멸망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면 그 선봉에는 언론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언론이 아예 거짓말을 하거나 그러진 않을 겁니다. 90%의 사실에 10%의 거짓이나 과장을 보태는 정도겠죠. 그런데 그 10%에 원하는 목적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강제출연 등으로 인해 AV 삭제 요청 급증... 아오이 소라도 전작 삭제"로 기사 제목을 뽑는다면 어떨까요. 제목만 읽는 사람들은 그 유명한 아오이 소라도 강제출연이었어? 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10%의 양념만으로 사람들에게 거짓을 퍼트리는 게 가능합니다.
물론 기사 한두 개로 세상이 바뀌진 않겠지만, 스가 정권에서 주요 매체가 계속 관련 보도를 내놓으면 여론의 흐름은 쉽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언론 입장에서는 자극적으로 양념을 치면 칠수록 읽는 사람이 많아질 테니 경제적으로도 이득입니다. AV 덕후라 해도 언론에서 보도하면 그런가보다 할 겁니다. 누가 여러 언론을 대조하면서 이상한 점을 찾거나 논조를 문제 삼으려 할까요. 원래는 시민단체들이 이런 점을 지적하고 문제를 삼아 손타쿠에 대항해야겠지만, AV 관련 시민단체라봤자 안티 포르노 단체들이니깐 거슬릴 게 없습니다. SNS, 블로그, 유튜브는 근거 없는 낭설과 논리적 비약을 뒤섞어 좀 더 자극적으로 언론을 재생산합니다.
좀 더 심각한 문제는 반대 의견이 전혀 보도되지 않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는 일부 언론에서 과장된 보도를 하면 이의제기가 나오거나 반대 의견도 나오기 마련인데, 손타쿠가 작용된다면 그렇지가 못합니다. 심지어 AV 업계 내부 사람들에게도 손타쿠는 강하게 작용됩니다. AV 배우들이 안티 포르노 단체들의 헛소리에 대항하려 해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라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심각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고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시부야에서 AV배우들이 시위를 한다고 해도 언론이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 보도한다면 시대의 흐름에 묻혀 버릴 것입니다.
여론전에서는 구체적인 사실관계보다는 전반적인 흐름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국가기관은 흐름을 움직이려 하고, 알아서 기는 언론들은 정권의 입맛에 맞게 보도를 하고, 진실에 관심 없는 대중은 언론을 그대로 소비합니다. 포르노를 규제한다고 하면 반발이 강하겠지만 강제출연을 규제한다 하면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무엇이 사실인지 진위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입니다 운운하며 업계 사람들을 다 공범 취급해도 상관없습니다. 뜬금없이 바코바코 제작진을 때려잡는 게 업계 사람들한테는 말도 안 되는 걸로 보일지 몰라도 대중의 눈에는 이상할 게 없습니다. 직업안정법이 문제되어도 강제출연이라 보도하면 강제출연이 되고, 부모에게 들키는 게 두려워 작품을 삭제해도 강제출연이라 보도하면 강제출연으로 삭제한 게 됩니다. 공기의 검열이 이루어진다면 다 가능한 일입니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AV 규제가 강제출연과 별 관련 없다 하더라도 검열된 공기 속에서는 효과적으로 AV를 규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 있다시피 AV 규제는 정치적 사안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쉬운 대중적 정치의 사안입니다.

일본의 기사는 한국에 그대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대 입장은 보도되지 않습니다.
AV가 멸망한다고 한들 이웃나라 불 건너 강구경 하듯이 여기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의 성문화가 한국에 주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일본의 흐름이 바뀌면 한국의 흐름에도 영향을 주는 게 당연합니다. 산업구조가 아예 바뀔지도 모르니깐요. 반대로 한국 에로 시장이 탄력을 받을 수도 있겠네요. 한국 국내법상 한계는 있겠지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일본의 언론 보도들이 한국에서 번역되고 재생산되는 방식입니다. 일본의 기사들은 한국에 100% 그대로 전달되진 않아요. 이 역시 입맛에 맞게 변형되거나 왜곡됩니다. 요즘 트렌드가 페미니깐 그쪽 입장이 많이 섞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니깐 언론에서 아무리 헛소리를 해도 믿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조회수팔이 하는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낭설을 붙이면서 살을 붙여나갈 겁니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큰 그림을 그려보자면, 법적으로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도 싶네요. 지금으로서는 N번방 방지법 같은 성폭력방지법 조항이 AV에 주는 영향이 거의 없다 봐도 무방하지만, 여론의 흐름이 바뀌면 바뀔수록 법도 바뀌기 마련입니다. AV가 강제출연으로 만들어졌다고 일본 내에서 난리를 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AV를 막을 만한 명분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겁니다.
좀만 더 덧붙이자면 언론 기사를 볼 때는 인용된 원문을 그대로 찾아보는 게 좋습니다. 한국에 어떤 보도 내용이 있다면 참고한 일본 쪽 기사들이 있을 테고, 일본 쪽 기사들이 인용한 원문이 또 따로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AV 관련해서는 AV인권윤리기구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도하고, HRN 같은 시민단체의 헛소리를 짤막하게 덧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전문가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다 입장이 다릅니다. 언론에서는 언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전문가로 불러옵니다. 다양한 의견, 특히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을 두루 알아보는 게 좋습니다. (근데 그렇게 찾아보는 게 사실 어렵죠...)
요약:
총리가 AV를 규제한다면 언론이 알아서 손타쿠할 것. 총리 입맛대로 보도된 기사들이 한국에서 페미 입맛대로 번역되고 재생산되어 한국의 AV 규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우려됨.
용자가 한국에서도 나왔으면 바래봅니다.
제가 만일 10대때로 돌아간다면 인생을 걸어볼텐데...ㅠㅠ
좋겠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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